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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영동의 추풍령, 단양의 죽령과 더불어
백두 대간을 넘나드는 고개 중 으뜸으로 칠 만큼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인근 월악산 자락에 위치한 하늘재(계립령)가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으나, 신라통일기에 처음 이 곳이 등장하고 고려말 공민왕 때에 이르러 초점(草岾)으로 불리다가 조선태종 때 옛길인 하늘재를 대신하여 본격적인 관로로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성종 ~ 중종기에 이르러 이 곳을 조령(鳥嶺)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원래 명칭은 "새재"인데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라는 의미이며 한자로 표기하면 초점(草岾), 조령(鳥嶺)이 됩니다.
조선초기에는 관료들과 양반들만이
넘나들 수 있던 길이어서 신분이 낮은
서민들은 꼭 한 번 걸어 보고 싶은
동경의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훗날엔 양반세력 뿐만
아니라 보부상을
비롯한 서민들 역시 이 길을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통행이 빈번한 교통의 요지다 보니 도적들이 기승을 부렸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이 곳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을 막지
않고 충주 탄금대로 후퇴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던 안타깝고 아쉬움이 묻어 있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근세에 들어와서
천주교 박해로 수 많은 신도들의 한이 맺힌 길이기도 합니다.
총
길이 10km인 문경새재는 외침에 대비하여 세 개의 관문을
두었습니다. 세 관문 중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시작으로 1관문과 3관문이 세워졌습니다.
새재 3관문은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을 경계짓는
새재 정상, 백두대간 마루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문경새재 관문들 중
괴산에서는 첫 관문이지만 경북 문경에서 봤을 땐 마지막 관문이며 조령관(鳥嶺關)으로 불립니다.
조선
선조 때 북쪽 오랑캐의 북침을 막기 위해 처음 성벽이 쌓아졌고 숙종 34년(1708년)
중창되었으나 1907년 을미의병 때 화재로 훼손되어 육추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홍예문과 135m의 석성과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입니다. 통행이 오고 가는 홍예문은 높이 3.88m, 폭 2.98m, 길이 6.12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cm입니다.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2mm, 길이 185m이고, 부속 산성은 산맥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입니다.
이곳 문경새재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은 김여물장군등 부하장수들의 이 곳 새재방어 권유를 무시하고
충주 탄금대 배수진을 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 곳이기도
합니다. 문경새재 1관문부터 잘 닦인 도로를
따라 2관문을 거쳐 3관문을 넘는 고갯길은 옛 길의 향수를
달래며 과거 선조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며,주변에 솟은 거대한 기암 산봉우리들과 수려한 계곡 풍경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실로 문경쪽으로는 조령산, 신선암봉, 주흘산,부봉등의 수려한 기암봉들이 새재길을 감싸 안고
있으며, 삼관문을 넘어와 충북 괴산으로는 신선봉과
마폐봉이 새재길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가을 단풍이 물들 때면 문경새재길의 아름다움은 절정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삼관문은 충북 괴산 고사리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교통은 물론, 지리적인 측면에서 좋습니다. 3관문 바로
아래에는 조령산 자연휴양림과 시설좋은 펜션들 그리고
향토식당들이 길을 따라 즐비하며 가까운 거리엔 수안보 온천휴양지가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 곳으로 끌어 당깁니다.
-문경새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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